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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경주 역사 유적 지구(남산 지구, 월성 지구, 대릉원 지구, 황룡사 지구)

by 잡학다식이요 2023.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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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있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위치한 유적지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경주 역사 유적 지구는 남산 지구, 월성 지구, 대릉원 지구, 황룡사 지구, 산성 지구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 남산 지구

경주 남산은 금오산이라고도 합니다. 동서로 4km, 남북으로 8 km 뻗어 있습니다. 100여 곳의 절터, 80여 구의 석불, 60여 개의 석탑이 있으며, 서남산과 동남산으로 구분됩니다.

남산 서쪽의 기슭에 있는 경주 나정은 신라의 첫 임금인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가 깃든 곳입니다. 양산재는 신라 건국 이전 서라벌에 있던 6촌의 조상을 모신 사당입니다. 포석정터는 돌에 홈을 판 개울 근처에 앉아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다양한 시를 서로 읊으며 화려한 잔치를 즐기던 곳입니다.

동남산에는 다양한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한국적 아름다움과 자비가 가득한 보리사 마애석불과 9m 높이의 사면 바위에 탑과 불상 등을 새긴 불무사 부처 바위가 있습니다. 또한, 바위에 아치형 모양을 파고 앉은 부처골 감실 석불 좌상 등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미륵골 석불 좌상, 용장사곡 삼층 석탑, 칠불암 마애불상군이 있습니다. 

 

2. 월성 지구

경주 역사 유적 지구 중 월성 지구에는 계림, 월성, 동궁과 월지, 첨성대 등이 있습니다. 

계림은 월성과 첨성대 사이에 위치한 숲입니다. 경주 김 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깃들어 있어서 옛날부터 신성한 곳으로 여겼습니다. 1803년(순조 3)에 세운 김알지 탄생에 대한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월성은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 하여 반월성이라고 합니다. 또는 왕이 계신 성이라는 의미에서 재성이라고도 합니다. 성안에 많은 건물터가 남아 있고, 1741년에 옮겨온 석빙고도 있습니다.

동궁과 월지는 신라 왕궁의 별궁 터입니다. 당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임해전(임해전이란 신라에서 봉래산을 본떠서 만든 전각입니다.)에 대한 기록을 기준으로 현재의 자리는 안압지로 추정됩니다. 안압지는 임해전 앞에 신라의 지도 모양으로 판 연못입니다. 

첨성대는 신라 시대에 천체 움직임을 관측하던 천문 관측대입니다. 기단부 위에 원통부를 올리고 정상부를 얹은 형태입니다. 신라 선덕 여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고,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입니다. 이 천문대로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 줍니다.

 

3. 대릉원 지구

경주 역사 유적 지구 중 대릉원 지구는 신라의 왕이나 왕비, 귀족 등의 높은 신분 계층의 무덤들이 있는 지역입니다. 250여 개의 무덤 중에서 거대한 봉분을 갖춘 왕릉은 23개이고, 나머지 무덤은 일반 묘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무덤 중에서 천마총, 황남대총, 미추왕릉등이 뛰어납니다. 

천마총은 원래 경주 고분 제155호 무덤으로 불렸지만, 현재에는 천마총이라고 불립니다. 금관, 장신구와 무기, 유리잔, 각종 토기 등 총 1만 1500점에 달하는 유물이 함께 발굴되었습니다. 이 유물로 당시의 생활상 및 고대 미술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습니다. 

황남대총은 '황남동에 소재한 신라 최대의 고분'이라는 별칭이 있습니다. 별칭처럼 남쪽과 북쪽 고분에서 약 5만여 점의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북쪽 무덤에서는 금관을 비롯해 '부인대'라는 여자 허리띠와 목걸이, 팔찌 등의 장신구가 발견되었습니다. 남쪽 무덤에는 남자의 뼈와 금동관, 무기 위주의 유물이 나와 부부의 무덤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미추왕릉은 신라 최초의 김 씨 왕으로 백제의 여러 차례 공격을 막아 내고 노업을 장려한 신라 13대 왕인 미추이사금의 무덤입니다. 

 

4. 황룡사 지구

황룡사 지군의 주요 유적으로는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있습니다.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때 짓기 시작했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처음에는 궁궐을 지으려고 했으나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나자 이를 심상치 않게 여겨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공했다고 합니다. 이후 진평왕 때 5m 크기의 불상을 모시기 위해 금당을 지었고, 선덕 여황 때 자장의 권유로 9층 목탑을 짓게 되었습니다. 

주변 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한 기원을 담아 지은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가 약 80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지어졌습니다.  이후 황룡사는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불에 타 현재는 건물 터와 주춧돌 일부만 남아있습니다. 

1976년부터 시작한 항룡사 발굴 조사에서는 금동불입상, 금동 귀걸이, 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황룡사 옆에는 분황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현재는 건물의 터에 모전 석탑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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